동양자수박물관

관람후기

신사임당이 개척한 초충도

작성일
12-01-28 13:13
작성자
관리자
조회
8,624

첨부파일

  •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소소한 풀벌레­야생화 어우러진 자연의 찬가

1 ‘초충도(16세기?)’. 강릉시립오죽헌박물관 소장. 이 ‘초충도’는 5만 원 지폐에 실려 있는 이미지의 원본이다. 지금까지 전하는 신사임당의 그림 가운데 진작(眞作)으로 밝혀 진 것은 한 점도 없는데, 이 작품은 비교적 진작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2 ‘들국화’(19세기). 프랑스 파리 기메동양박물관 소장. 신사임당의 작품을 떠올리게 할만큼 그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민화다. 3 ‘자수화조문보자기’(19세기). 한국자수박물관 소장. 자수를 통해 조선 여인들의 특출한 조형적 능력을 엿볼 수 있다.



5만 원권 지폐를 살펴보자. 앞면에는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의 초상화와 그의 대표작 초충도(草蟲圖·강릉시립오죽헌박물관 소장)가 등장한다. 한국은행은 5만 원권 지폐의 ‘모델’로 신사임당을 선정할 당시 여성에 대한 배려를 중요한 이유로 밝혔다. 또 교육과 가정의 중요성을 환기하기 위함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풀벌레 그림인 초충도에는 의외로 역사적 상징성이 숨어 있다. 초충도는 사실 전통회화 관점에서 보면 중심에 서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들길의 야생화와 논길의 벌레를 무심코 지나치듯 풀과 벌레는 화가들의 애정 어린 눈길을 좀처럼 받기 힘든 소재였다. 많은 화가가 대체로 오이넝쿨이나 참외보다는 모란 연꽃처럼 화려한 식물을 선호했다. 또 개구리 굼벵이가 아닌 호랑이나 용처럼 위엄 있는 생명을 더 좋아했다. 하지만 신사임당은 달랐다. 사소하고 하찮고 평범한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 펼쳐 보였다.

○ 자연의 오묘한 관계가 숨 쉰다

물론 신사임당이 초충도를 선택한 이유가 남녀의 일을 엄격히 구분하는 조선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갖게 된 여성적인 취향에 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인 율곡 이이(李珥·1536∼1584)가 ‘풀과 나무와 새와 짐승들에도 각각 합당한 법칙이 있다’라는 격물치지론(格物致知論)을 펼친 것을 보면 풀벌레에 대한 관심은 신사임당이 품고 있던 신념의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신사임당은 초충도를 통해 시인의 예민한 감각은 물론이고 생물학자의 치밀한 관찰력까지 표현해냈다. 그의 그림엔 자연의 오묘한 관계와 작은 소리까지 숨어있다. 숙종 때 문인 신정하(申靖夏·1680∼1715)는 사임당의 초충도를 본 뒤 감탄해 그림을 묘사하는 시까지 썼다. “첫째 폭(신사임당의 초충도는 병풍에 그린 것임)엔 오이넝쿨 언덕 타고 감기는데, 밑에서는 개구리가 더위잡고 올라가네/둘째 폭엔 참외들이 온 밭에 깔려 있고, 단내 맡은 굼벵이가 흙 속에서 나오누나/셋째 폭엔 수박 위에 찬비가 흩뿌리는데, 쓰르라미 스렁스렁 깃을 떨기 시작한다.”

○ 미물 속에 자연의 평화가
신사임당은 서민의 그림인 민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다양한 민화에서 시간을 초월하는 그의 영향력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초충도를 연상케 하는 작품으로 19세기에 그려진 ‘들국화’(프랑스 파리 기메동양박물관 소장)를 꼽을 수 있다. 이 그림은 바위 곁에 활짝 핀 들꽃과 벌레가 어우러진 자연의 세계를 나타냈다. 색색의 들국화가 피어 있고 그 사이에서 들국화 잎이 춤을 추듯 너울거린다. 그림 위쪽에선 나비 한 마리와 다른 벌레 두 마리가 꽃향기를 이기지 못하고 날아든다. 개구리는 용케 벌레를 잡는 데 성공한다. 이 그림에는 도무지 어두운 그림자가 없다. 오른쪽 아래에는 색띠로 채색된 바위들이 흥겨운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아마 낙천적인 가치관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그는 변변찮은 미물을 통해 자연의 평화로움을 아름답게 노래했다. 만물이 서로 어우러져 공존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 ‘자연의 찬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화려한 색채로 재탄생하다

신사임당이 선구자 역할을 한 초충도의 세계는 자수에서도 꽃을 피웠다. 그의 그림들은 조선시대 내내 자수로 제작됐는데 보물 제595호 ‘자수초충도병풍’과 중요민속문화재 제60호 ‘초충수병’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가 태어난 강릉은 현재 자수의 문화로 유명하다. 평범한 생활용품에 지나지 않던 강릉자수는 최근 세계인의 감탄을 자아내는 보석이 됐다. 강릉에서 자수 같은 규방문화가 발달한 배경에는 신사임당 같은 사대부 여인의 전통이 있다. 또 현대에 들어 그 아름다움에 주목한 사람들의 역할도 컸다. 한국자수박물관의 허동화 관장 같은 사람들이 강릉자수를 비롯해 우리나라의 자수와 보자기를 세계 여러 박물관에서 전시하며 그 아름다움을 널리 알렸다.

강릉자수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자수화조문보자기’(한국자수박물관 소장)다. 색동처럼 여러 색으로 표현한 이 보자기는 언뜻 보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새와 나비들이 꽃으로 날아드는 장면임을 알 수 있다. 작품은 자연의 모습에 다채로운 색깔의 띠를 입혀 화려하고 장식적인 이미지로 만들었다. 일반적으론 형태가 먼저 눈에 띄고 다음에 색채가 보이는데 이 작품에선 거꾸로 색채가 형태에 앞서 화면을 지배한다. 상식을 통쾌하게 뒤집은 상상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오랜 세월 동안 역사의 그늘에 파묻혀 있던 세계가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평범한 일상이 미술의 키워드로 떠오르고 제3세계의 문화가 관심의 대상이 되는 등의 변화가 그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사임당 역시 소소한 자연에 깃든 가치와 아름다움을 회화를 통해 표현했다는 점에서, 그 선구자적인 역할을 재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병모 경주대 교수(문화재학)·한국민화학회 회장 chongpm@gju.ac.kr

동아일보, 2012.1.28
목록
전체220개, 현재7/전체8페이지
게시물 검색
No.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공지 지역한복문화의 발굴과 확산을 위한 제안(2021 한복문화센터 주… 관리자 2026-07-19 1365
공지 가정의 달을 맞아 '어머니'를 기리며.. 관리자 2026-05-07 2146
공지 어린 시절의 동화 관리자 2026-02-19 2954
공지 실크로드와 같은 나의 자수수집의 긴 여정 (35년의 자수수집인생… 관리자 2025-12-26 3813
공지 어머니, 열정, 미소, 사랑, 영원(복음신문 기고글) 관리자 2025-08-04 4785
공지 문화올림픽을 꽃피운 열정(전보삼, 강원도민일보 기고문, 2018) 관리자 2024-11-21 6112
공지 한국자수가 가야할 길 관리자 2024-05-06 7493
공지 자수보자기의 한 땀속에 담긴 미학(자수보자기 전시회 도록 발… 관리자 2023-11-26 9053
공지 어머니의 집 관리자 2023-03-09 12713
공지 명상과 치유의 예술공간 관리자 2022-12-26 13680
공지 마크 로스코 관리자 2022-12-25 13409
공지 실크스크린 체험 관리자 2022-10-28 13976
공지 어머니의 꿈 관리자 2022-10-16 14161
공지 강릉의 동양자수박물관은 존속해야 한다 관리자 2022-03-18 16956
공지 가장 지역적인 것이 세계적인 관리자 2022-02-10 17062
공지 문화재지킴이 관리자 2022-01-27 17259
공지 강릉수보자기의 기적 관리자 2022-01-02 17215
공지 강릉자수는 어디로? 관리자 2021-11-29 18176
공지 박물관존속에 대한 못다핀 글 관리자 2021-11-26 17840
40 영.미소녀의 꿈, 샘플러 안영갑 2012-02-11 6607
39 색동 조각보의 미학 안영갑 2012-02-11 6642
38 근대 회화자수의 탄생 안영갑 2012-02-11 6986
37 횃대보의 추억 안영갑 2012-02-10 6921
36 전시실속의 각시인형 안영갑 2012-02-10 6599
35 한국미의 중요성 안영갑 2012-02-09 6405
34 스토리의 힘: 서울 정동 근대 문화 유산 골목 관리자 2012-02-04 7373
33 사임당과 동양자수 박물관 안영갑 2012-02-02 7725
32 베갯모의 꿈 안영갑 2012-02-01 7240
31 신사임당이 개척한 초충도 관리자 2012-01-28 8625
30 생명의 노래 안영갑 2012-01-25 6826
29 박물관은 치유예술의 공간 안영갑 2012-01-21 6819
28 어머니가 그리우면 자수 박물관에 가자 안영갑 2012-01-15 6763
27 규방예술의 고향, 강릉 안영갑 2011-12-29 6828
26 문화 다양성과 제국주의 안영갑 2011-12-25 6609
25 이야기가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 관리자 2011-11-29 6921
24 백범 김구, '나의 소원" 중 안영갑 2011-11-25 6959
23 동양자수 박물관의 정신 안영갑 2011-11-09 6680
22 간송 미술관의 정신 안영갑 2011-10-30 6615
21 박물관은 창의성 교육의 산실 안영갑 2011-10-04 7048
20 박물관을 소개한 훌륭한 블로그 관리자 2011-09-21 6908
19 사립 박물관의 가치 안영갑 2011-08-28 7529
18 살아있는 글 안영갑 2011-08-05 7091
17 만남 bella 전 2011-08-05 6754
16 스토리 텔링 안영갑 2011-07-30 7216
15 '모정의 편린' 자수 박물관 관리자 2011-07-25 8499
14 두분 고견에 감사드립니다. 관리자 2011-07-24 7002
13 박물관과 주변의 풍경도 넣어서 차량으로 가는 사람이 도움이 되… 박상익 2011-07-24 7454
12 소장품을 계절별로 10작품이상을 싸이트에 올려놓으면 더 좋을것… 차현숙 2011-07-24 7599
11 우리사회의 진정한 어머니들의 혼과 영혼이 살아있어 흥분되었다… 박상익 2011-07-24 7083
처음  1  2  3  4  5  6  7  8  맨끝